ByongWo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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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최영자 교수와 옷 이야기

십여 년 전, 하와이에서 성악과 출신 음악대학 동기인 황추자선생을 우연히 만났다. 황선생은 우리 대학 동기들이 서울에서 매달 첫째 화요일 점심시간에 만난다고 하면서 서울가면 한 번 참석해보라고 권하였다. 주로 여성 동기들이 15명 정도 모인다고 했다. 나는 호기심에 한 번 참석하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1964년 2월 마지막 날, 늦겨울 먼지가 휘날리는 동숭동 문리과대학 운동장에서 졸업식을 치른 후 다음 날 징집 명단에 없는데도 논산훈련소로 내려가 떼를 써서 자진 입영을 하였다. 그 후 제대하자마자 미국유학을 떠났고, 하와이대학교의 현 직장에서 거의 50년 동안 교편을 잡고 있으니 모국에서의  동창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2000년대 초 5월 어느 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난생 처음 동기들이 만나는 동창모임에 나갔다. 나는 대학 다닐 때 숫기도 없고, 남루하고, 촌스러운 남자아이였다.  한국전쟁의 휴유증이 깊게 남아있어 가난하기도 했지만,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대부분의 음악대학 여학생들은 부유한 집 딸들 같았고, 꽤나 멋을 부리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대의원이라는 감투를 썼기 때문에 1,2학년 때는 학생과장 김학상 교수님 지시로 교문 앞에 서서 하이힐을 신고 오거나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들어 오는 여학생들을 세워 놓고 욕을 먹어가면서 단속(?)을 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단속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음 기회에 단속 대상에 걸렸던 동문들에게 알아 봐야겠다. 그 때는 음악대학 남학생들도 대개는 피부가 하얗고, 허약하고, 여성스러워 보였다. 동기 동창들이 모인다는 압구정 어느 일식 집에 들어 섰더니 여자 동문들만 12명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중에서 제일 반갑게 눈에 띄는 사람은 작곡가 서경선 교수였다. 서교수와는 학생 때 행사도 같이 하고 해서 비교적 대화를 많이 한 편이었고, 그가 한양대 음대학장으로 있을 때는 내가 특강을 한 후에 점심을 대접받은 적도 있었다. 12명중 7, 8명은 어렴풋이 무슨 전공을 한 누구일 거라는 짐작을 했지만, 4, 5명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4년 동안 음악대학을 다니면서 대화를 한 번도 안 해본 동문들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은 학생 때처럼 부끄럼도 타지 않고 조금은 뻔뻔해졌다는 점 일 것이다. 나이 탓일까? 내 솔직한 기분을 인사말로 대신했다: “내가 4년간 학교 다니는 동안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동문도 있고, 기억이 나지 않는 동문도 있지만 4년간 같은 공간에서 같이 공부한 동문들을 반 세기 만에 만나 보니 감개무량하다고…” 실로 우리는 반 세기 만에 과거로 돌아간 “imaginary community” 를 공감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피아노과 출신인 세종대 최영자교수가 (현 명예교수) “숙소가 어디세요?” 하고 물어 왔다. “역삼동쪽”이라고 했더니 최교수가 가는 방향이  양재동쪽이라고 가는 길에 데려다 주겠다고 해서 그의 차에 탔다. 그 날 사실 최교수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 동문 중 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최교수는 부산의 명문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학생 때 상당한 미인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바라 볼 수도 없던 사람이니 기억을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숙소 쪽으로 가는 도중 최교수가 의외의 얘기를 꺼냈다. “오래간만에 (그렇다 46년 만에?) 이병원씨를 만나니까 두 가지가 생각 나네요!”
“아! 저에 대해서 생각나는 게 있어요? 뭔데요?” 나를 기억하는 것이 있다니 반갑기도 하고 약간 두려움도 생겼다. 혹시 내가 모르고 지나간 실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나는, 이병원씨가 처음에는 가짜 음악대학 학생인줄 알았어요. 다른 대학의 체육과 학생이 여학생 꼬시러 강의실에 앉아 있는 줄 알았어요. 2, 3주 후부터 강의 시작 전에 출석부를 갖고 들어 와 출석 체크를 하길래 아! 가짜 학생은 아니구나 했어요.” 그 당시 그런 남학생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사실 대학 입학 전까지 유도와 역도로 다져진 단단한 체구를 갖고 있어서, 음악대학 학생이라기 보다는 운동선수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참이었다. 다행이다 싶어 다음을 물었다.
“두 번째로 생각나는 건 뭐지요?” 흥미도 생기고 궁금증이 발동했다. “이병원씨는 혹시 4년 동안 교복 한 벌로 지내지 않았어요? 언제 봐도 항상 똑같은 교복만 입고 다녔던 것 같아요 ” 나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초라했던 50여 년 전의 대학4년 동안의 내 모습을, 나는 벌써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잊어버리고 싶었던 내 모습을 그 녀가 상기시켜 준 것이다. 갑자기 서글픈 기억이 떠 오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맞는 얘기다. 그 당시 대학에 입학하면 모든 남학생들은 교복을 맞춰 입었다. 나는 입학 때 4년을 염두에 두고 교복을 큼직하게 맞췄다. 추운 겨울에는 속옷을 두 겹 씩 껴 입어도 넉넉할 정도로 크게 맞췄다. 그러니 헐렁해 보이는 여름에는 내 모습이 얼마나 볼 품 없었을까? 손등 중간까지 내려오던 소매는 1년이 지나면서 점점 짧아져 졸업할 무렵에는 손목에서 3cm 가량 올라 갔다. 바지는 엉덩이 쪽이  달고 혜져서 천을 대고 재봉틀로 몇 차례 박았더니 4학년 때는 거의 방석을 엉덩이에 대고 다니는 수준이 되었다. 이러한 옷에 대한 과거를 생각하니 순간 눈시울이 축축해지는 것 같아 얼굴을 돌려 차창 밖을 내다 보며 내 감정을 추슬렀다.
한편 반세기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최교수가 신기하게 생각됐다. 나는  복받치는 감정을 갈아 앉히려고 기분을 바꿔 최교수에게 농담을 던졌다.
“나에 대해서 그렇게 잘 기억하시는 걸 보니 나한테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최교수는 “물론 관심 있었지요!”라고 답을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깔깔 웃었다. 농담이라도 좋았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초라했던 나를 눈여겨봤던 동기생이 있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1966년 7월, 군 제대를 2개월 정도 앞두고, 나에게 옷 컴플렉스에 대한 한풀이를 할 기회가 왔다. 나는 그 때 KATUSA로 미8군 사령관 비서실 야간 당번 병으로 이틀에 한 번 저녁시간에만 근무했는데 낮에는 항상 자유로웠다. 그래서 1966년 3월에 대학원에 입학하고 한 학기를 다닐 수 있었다. 제대를 2개월 앞 둔 고참 병이었고, 후임 병도 배치 받아서 자유시간이 많아 유학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 영국계 무역회사의 서울 지사가 설립되면서 직원채용을 한다기에 응모를 하여 취직까지 했다. 그 당시 가깝게 지내던 초대 주한 이스라엘대사 부부의 적극적인 추천도 한 몫 했다. 일도 많았고 바빴지만 월급이 그 당시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삼성물산에 취직한 신참사원의 두 배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7월 월급으로는 빚진 것, 술집 외상값, 내가 신세 진 친구들 외상값을 우선 갚았다. 8월 월급을 받자마자 급히 퇴근을 하였다. 오스트리아인 지사장이 어디를 그렇게 서둘러 가느냐고 묻기에 양복을 맞추러 간다고 했다. 지사장이 내 단골 양복점이 있냐고 물었다. 단골? 웃으며 있다고 했다. 당신도 가을 sports jacket을 하나 맞추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내 일생 처음으로 내 옷을 맞추러 가는 마음이 급했지만 지사장 부부와 천천히 광교 쪽으로 걸었다.
나는 명동 방향으로 나오는 기회가 있으면 항상 을지로 입구에서 종로 입구 쪽으로 쭉 늘어선 고급 양복점을 천천히 구경하곤 하였다. “내가 돈이 생긴다면…..” 무엇을 어떤 패션으로 맞출 것인지 마음의 준비(?)를 하는 취미가 있었다. 광교의 양복점 중에서도 미조사라는 양복점이 제일 맘에 들었다. 내 기억으로는 미조사가 광교에서 가장 늦게 문을 닫은 양복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조사 안에 들어서자 마자 네 벌의 양복과 코트를 제일모직에서 나온 천 (당시 최고의 양복지)으로 골라 디자인에 대한 설명을 하는 데는 15분 정도 밖에 안 걸렸다. 왜냐하면 나는 옷을 맞추는 계획과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4년 동안 늘 해 왔기 때문에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너무 쉽게 결정하는 나를 보면서 미조사 주인도 약간 당황한 것 같았고, 지사장 부인도 놀래는 기색이었다. 지사장이 입사하고 두 달 동안 고생을 많이 했으니sports jacket 을 하나 선물하겠다고 해서 양복, 코트 등 5벌 주문을 순식간에 끝냈다. 그 때 맞춰 입었던 양복 중 1975년에 입은 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회사 임시 사무실과 지사장부부의 숙소가 있는 반도호텔(현재 롯데호텔과 프레지덴트호텔사이)로 돌아 와서 저녁식사를 하던 중 지사장 부인이 호기심 섞인 표정으로 나한테 질문을 하였다.
“너 왜 옷을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맞췄냐?”
나는 대학생 때의 나의 형편과 교복 얘기를 해 줬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옷 때문에 움츠려 드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금 입고 있는 이 양복도 친구에게서 빌려 입은 것이라고 했다. 젊었을 때 꽤 예뻤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지사장 부인은 동정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새로 맞춘 옷을 입고 다니면서  초라했던 과거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몸은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누가 옷이 날개라고 했던가?  새 양복과 좀 더웠지만 코트를 팔에 걸치고 출근하던 그 날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즐거운 날이었다. 그러나 내가 유학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지사장에게 숨기고 있어서 뒤통수 한 편은 늘 무거웠다. 제대 후 본격적으로  무역회사에 남아 사업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 파격적인 대우를 팽개치고 유학의 길을 떠날 것인가를 혼자서 몰래 고민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나는 유학 길을 선택하였고 음악대학 교수로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 이 선택이 올 바른 선택이었는가에 대해서 부질없는 회상을 해 보곤 한다.